‘아벨’에는 평소에도 손님이 꽤 드물었다. 정확히는 손님간에 마주침이 있거나 겹침이 없도록 모든 공간들을 분리해서, 들어설때부터 가게를 나갈때까지도 종업원 외에 타인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이토록 철저한 룸 형식이기에 누군가를 몰래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아벨’의 손님으로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정계나 재계 쪽 사람들이라거나 나랏밥을 먹는 사람들, 혹은 연예인들 같은. 그렇다고 ‘아벨’이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다면 가게의 특성인 보안이 제대로 되기 어려웠고, 소수의 사람들이 애용하는 식당이었다. 이런 식당을 태준이 알게 된 건, 순전히 선우의 덕이 컸다. 선우는 아역배우때부터 연예계에 몸담은 사람이었다. 근 20년 가까이 된 그 세월 속에서 이런 식의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꽤 여러곳 자연스레 터득했고, 태준에게 소개했다. 태준은 온전히 선우와 함께 하는 시간과 식사에 집중할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좋았다. 그리고 ‘아벨’의 식사도 꽤 맛이 있었다. 조금 비싸기야 하지만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곳이어서 선우와 자주 오던 곳이었다.
“오늘 연어가 맛있네.”
선우가 태준의 앞에 놓인 빈 접시 위로 선명한 오렌지빛의 회 한 점을 올렸다. 태준이 고개를 들어 선우를 보았다. 선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서 먹어, 하고 젓가락을 살짝 흔들기에 태준이 제가 쥐고 있던 젓가락으로 선우의 젓가락을 툭 쳐냈다.
“됐어. 알아서 먹을 테니까 치워요.”
“이것도 좀 먹어볼래?”
“내가 알아서 먹겠다니까?”
태준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본래도 많은 날들이 남의 친절을 마구 거부하는 말투를 구사하곤 했지만, 선우에게는 잘 그러지 않던 태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태준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이를 악 물었다. 선우가 다시 태준의 접시 위로 수육 한점을 놓았다. 아씨- 태준은 눈물이 핑 도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코끝이 시큰했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울고 싶었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 * *
태준과 선우가 처음 만난 건 어느 여름이었다. 태준은 당시 배우로 전향한지 얼마 안 되어 연기가 목석과도 같았고, 회사에서 지원하는 연기수업을 받고 있었다. 나름 다양한 무대 위에서 쇼를 위한 연기를 선보여왔던 태준이지만, ‘진짜 연기’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기초도 없는 초짜의 것은 연기라고 불리기에 헛웃음이 나올만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 같은 소속사의 대선배인 선우가 들어와 태준의 연기를 지켜보다 적나라한 욕을 내뱉을 때도 태준은 별로 타격이 크지는 않았다. 제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 하는 실력이니 들어도 싸다고 도리어 생각했다.
“왜 연기를 하지? 지금이라도 공부해서 공무원 되는 게 더 빠를 거 같은데.”
선우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신랄했다. 연기 지도를 하고 있던 선생조차도 선우의 경력에 견주자면 어림도 없을 정도로 선우는 오랜 내공이 있는 배우였다. 아무도 그의 지적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 태준을 지도하던 연기수업 선생이 선우가 방문했던 이후 수업을 그만두었다. 정작 지적받은 당사자인 태준은 좀 더 노력해야겠다 마음을 다잡았는데, 도리어 마치 본인이 태준을 잘못 지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수업이 붕 떠버렸다. 나름 태준을 키우려고 적극 밀어주고 있던 소속사 측도 당황스러울 상황이었다. 결국 적임자로 선우가 선택되었다. 태준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다만 선우는 소속사 측에서 시키니 일단 오기는 왔지만 처음부터 태준을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본 열 번 필사로 써 와.”
“오늘 비 오니까 대사 외우면서 회사 한 바퀴 뛰고 와.”
“볼 일 보고 올 테니까 나 올 때까지 기마자세 하고 있어.”
분명 선우가 요구하는 것들은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태준은 독한 면이 있었다. 모델을 하던 시절에도 쇼를 앞두고 몸매 관리를 위해 독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독하게 운동하기도 했다. 지금은 배우를 하겠다고 전향했고 마음을 먹었다면 노력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힘들긴 했어도 꿋꿋이 묵묵하게 선우의 요구를 모두 따랐다. 대본 필사도 글씨 날림 절대 없이 열 번을 채웠으며, 비 오는 날 사옥 한 바퀴도 군말 없이 뛰었고, 선우가 기마자세를 시키고 나간 뒤 몇 시간 뒤에 돌아왔어도 땀을 뻘뻘 흘리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기마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노력에서 진심을 본 것일까. 선우는 문득 본격적으로 태준에게 진지하게 연기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발성하는 법부터 얼굴의 근육을 잘 쓰는 법, 감정의 표현은 표정만이 아니라 손 끝과 몸의 전체까지 사용하는 것이란 것 등. 물론 여전히 선우는 까칠했고 친절하지 않았다. 매서운 지도였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 배워가는 보람이 있었다.
차츰 태준은 선우를 동경했다. 태준이 배우로 전향하게 된 이유는 그저 이제 모델계에서도 새로 뜨는 모델들에게 밀려날 즈음에 제의를 받아 새로운 길을 가야겠다 하고 생각한 것일뿐이었다. 무언가 연기에 대한 꿈이 각별하게 있던 게 아니었다. 그냥 이제 제 직업이 되었으니까 열심히 하겠다 생각했지 목표가 없었다. 그런데 선우는 아주 어릴 적부터 꾸준히 연기를 하면서, 분명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을 때도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노력하여 다시 활동을 이어간 모습들이 존경스러웠다. 저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다. 태준이 선우에게 연기를 배우고 두 계절이 지났을 때 선우는 이제 태준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쉽게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던 태준이, 말은 까칠하게 할 지언정 저에게 도움이 되는 피와 살과 같은 말들을 해주는 선우에겐 점차 마음이 열려 함께 술을 마시러 가기도 할 정도가 되었다.
“오늘 술 한잔 할래?”
작은 역할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맡은 역이라면 충실히 해내야 했건만, 제대로 연기가 되지 않는 게 답답해서 연습때 조차 풀리지 않았던 날이었다. 연기 연습 내내 선우에게 엄청 깨졌는데, 헤어지기 직전 선우가 태준을 붙잡았다. 태준은 딱히 거절하지 않고 선우를 따라갔다. 그날은 선우가 태준을 제 집으로 데려갔다. 집으로 데려간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술 잔을 기울이며 선우가 보여준 것은 유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어느 대본들이었다. 태준은 익숙한 제목을 보고 그것이 선우가 슬럼프 이후 다시 재기에 성공했던 단편영화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 선우에게 연기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섭렵했었고, 특히 감명깊게 봤던 영화였다.
“뭐,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고.”
별 말 아닌 듯 하면서도 태준에게 꽤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덕분에 태준은 찡한 마음이 쑥스러워 제 주량을 훌쩍 넘겼음에도 계속 술을 넘겼다. 점차 혀가 풀려서 발음이 씹혔고 몽롱한 눈으로 훅훅 더운 숨을 내뱉던 태준이 선우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배님… 제가 진짜여...”
“그래그래.”
웅얼웅얼 선우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치며 말할 때까지도 선우는 그저 가볍게 픽 웃으며 손을 슬쩍 뺐을 뿐이다. 선밴님, 진짜.. 제가 정말.. 종경함니다. 태준이 이렇게까지 취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 여름보다 어느새 경계심과 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태준으로선 드문 일이었다. 선우도 드물게 태준의 취중 존경고백에 태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그날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태준이 밀어넘긴 선우의 어깨에, 바닥에 깔아두었던 카펫이 닿았다. 그리고 술냄새가 가득 담긴 더운 숨이 선우의 입으로 삼켜졌다. 태준은 이미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위에서 싫어요? 묻는 말에 선우도 별 다른 대답이 없었다. 선우는 몸이 제법 찼지만 태준은 뜨거웠다. 극과극으로 다른 두 체온이 섞이는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태준은 며칠간 선우를 눈에 띄게 피했다. 오로지 일적인 부분만 마주하고 선우가 다른 무슨 이야기를 할라치면 재빨리 내빼버리고 도망쳤다. 정신을 차리고 제가 한 행동이 그대로 기억에 남아 있어 큰 충격을 받았던 탓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선배에게 무슨 몹쓸 짓을.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다. 저를 위해 애써 위로 해 주려던 존경하는 선배를, 몸으로 위로 받아버리다니. 태준이 비록 마음을 연 사람들에겐 스킨십도 잦고 서스럼없었지만, 선우와는 그 정도로 서스럼 없는 사이까진 아니었다. 분명. 술기운에 좀 더 마음이 열린 건 사실이지만. 애초 타인에게 태준이 그런 정도로 서스럼 없이 굴어 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제가 다 어이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데 선우는 어떨까 생각하니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연기수업도 빼먹긴 뭐해서 어찌 나오긴 나왔지만 이제 글러먹었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최근 슬럼프여서 원체도 연기가 잘 안 풀렸다만 그것과는 또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연기를 해야 하는데 괜히 선우의 얼굴을 힐끔 보게 되고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자꾸 다시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미친놈.”
시원한 물로 세수를 해도 얼굴의 열이 가시지 않았다. 태준은 중심이 무너지고, 선우와의 선을 넘어버린 스스로가 몹시 부끄러웠다. 핸드타올을 뽑아 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며 한숨을 또 내뱉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며 선우가 들어왔다. 헉 하고 놀라 태준이 주춤 굳어버렸지만, 선우는 입구를 막고 선 채 태준을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나만 즐겼어? 너도 즐겼으면 됐잖아?”
선우는 싱긋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태준을 쏘아붙이듯 질책하는 말투였다. 알고있었다. 선우는 그날 이후로도 아무일 없던 것처럼 매우 쿨한 태도를 유지했고, 오직 태준 혼자 이러고 있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하는 일이었다. 그날은 둘 다 술에 잔뜩 취했고 이성도 삼켜져 있었을 뿐이었다. 좀 전의 말 역시도 선우는 그런 의사를 담아내고 있었다. 둘 다 즐겼고, 그걸로 됐잖아?
“꼭 내가 나쁜놈이 된 거 같잖아, 니가 이러니까.”
태준은 선우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들지 못했다. 선우가 한 발 태준에게로 다가왔다. 태준은 제게 가까워지는 선우의 발끝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채였다.
“짜증나네. 야, 계속 그럴거면 똑같이 하고 끝내.”
“네?”
선우가 태준의 팔뚝을 쥐었다. 갑작스러워 태준이 어어 하며 그대로 선우에게 끌려갔다. 정신이 다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 하는 사이 태준은 이미 선우의 차에 올라타 있었고 차는 선우의 집에 도착했다. 우물쭈물하면서도 태준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선우를 따랐다.
탁. 삐리릭. 선우의 집 문이 닫히며 자동으로 잠금 장치 소리가 울렸다. 태준은 곧장 입을 맞춰오는 선우에게 붙들려, 분명 알콜 한방울도 섭취하지 않았음에도 금방 열이 확 올랐다. 스륵 태준의 웃옷이 벗겨졌다. 선우가 부드럽게 태준의 가슴께를 밀어 눕혔다. 어느새 태준은 선우의 침대 위에 쓰러져 선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멍한 태준의 눈에 선우의 얼굴이 담겼다.
선우는 한 번 더 관계를 가지고 난 후로도 여전히 쿨한 태도였다. 선우가 그 두 번의 밤을 민폐라고 생각지 않았고 가볍게 넘어갔으므로, 태준 역시도 더 이상 선우를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되레 솔직하게 구는 편이었다. 그건 선우가 태준의 울타리 안쪽에 제대로 들어간 것을 의미했다. 겉으로 보면 좀 더 친한 사이가 되었을 뿐이지만 태준이 제 울타리에 사람을 들인다는 건 약간의 집착이 가미되는 점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러했냐면, 태준의 연기지도가 꽤 효과가 좋은 것 같자 소속사의 다른 후배들도 선우에게 연기지도를 받고 싶다며 여기저기서 문의가 있었다. 다 거절할 순 없고 선우도 스케줄이 되는 한 적당히 봐주게 됐는데 분명 태준에게 한 것처럼 신랄하기 그지없고 악마조교와도 같은 무서움으로 후배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음에도, 태준은 선우가 저 외에 다른 후배를 가르치고 있는 것 자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몰래 뒤에서 그 사람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거나 다른 데서 마주치면 괜히 틱틱거리며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들보다 본인이 더 후배임에도. 태준의 뒷공작과 선우의 독설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이 버티지 못 하고 결국 선우의 연기지도를 받지 않게 되었을 때쯤은, 확실히 두 사람은 공인 된 '친분관계'가 되어 있었다. 선우의 독한면을 태준이 어떻게 버텨내는지, 태준의 까칠함을 선우가 어떻게 가만히 두는지 의아한 그런 친분의. 태준이야 원래 제가 친하다 여기는 사람에겐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는 편이지만 선우마저도 태준의 어깨를 토닥이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스킨십을 하게도 됐다. 연기를 가르칠 땐 여전히 칼같이 냉정한 선우였으나 연습이 끝나면 태준의 손에 대본을 쥐어주고 읽고 있으라면서 무릎을 베고 잠이 들기도 했다. 그래놓고 누가 둘이 친하냐 물으면 아뇨? 하고 의아해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선우가 저와 친분이 있던 감독과 갖는 술자리에 태준을 데리고 갔다. 태준은 친분 없는 타인이 있는 술자리를 못 견뎌했기에 온 몸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감독 쪽에선 태준이 눈에 들어왔던지 이거저거 묻는데도 태준은 제대로 대답을 안 했다. 결국 자리가 파한 후 선우가 태준에게 한마디 했다.
“야, 너.”
“그래도 선배님 봐서 나온거에요. 아니었음 오지도 않았어.”
“..너 성격이 원래 그런 건 알겠는데 이 바닥에 계속 있을 거면 고쳐. 좋을 거 하나 없다.”
선우가 어쩌면 크게 화를 낼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 아니, 내야 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선우는 말투는 딱딱할 지언정 화를 내진 않았다. 진심으로 태준을 위한 조언이었다. 태준은 여전히 툴툴거리며 “아 알겠다고요.” 라고 답하고는, 태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먼저 앞서 걷는 선우의 뒤를 쪼르르 쫓았다. 그리고 이후 태준은 비록 타인을 만날때여도 일적인 공간과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선 최대한 예의있는 모습을 갖추려고 애를 썼다. 어색하게 웃기도 했고 말투도 버릇없이 툭 내뱉었다가 금방 정정하기도 했다. ―안 먹… 아니, 지금 배 안고프니까 됐어요.― 급하게 고치는 티가 좀 났는지 나중에 선우가 태준을 슬쩍 불러다가 손을 까딱까딱 했다. 태준이 몸을 낮추면 선우가 태준을 쓰다듬는 것이었다. 잘했다고. 그럼 태준은 씨익 웃었다. 툭 태준의 배를 치면서 선우가 말했다. 뭐가 좋다고 웃어.
[뭐하세요?]
[선배님]
[바빠요?]
[많이 바빠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연출하게 되어 꽤나 바빠진 선우에게, 태준은 분명 답이 없는 이유를 알면서도 몇 차례나 메세지를 다다다다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별 용건도 없는 메세지가 대부분이었다.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수차례의 메세지를 보낸 끝에, 처음 메세지를 보내고도 약 6시간 후쯤에야 선우다운 답장이 한통 날아왔다.
[배터리 닳으니까 작작 보내]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편한 관계가 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다시 겨울이 되었을 때, 선우는 잘 찍지 않던 장르인 멜로를 한창 연기하고 있었고 태준은 집착이 조금쯤 더 심해져 있었다.
간만에 짬을 내 두 사람이 함께 술자리를 갖게 되었을 때다.
“선배님. 다른 사람 그렇게 보지 마요!”
태준이 더듬더듬 선우의 팔을 찾아 잡았다. 선우는 태준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팔을 조금 흔드는 거 같던 태준이 웅크렸던 상체를 곧게 펴고는 선우의 앞으로 덥석 가까이 왔다. 곧 선우의 얼굴이 태준의 양 손에 의해 단단히 붙잡혀 각도가 강제로 잡혔다. 태준을 억지로 향하게 된 선우의 얼굴은 여전히 별 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태준을 마주보았다. 태준도 말 없이 선우를 마주보며 눈을 맞췄다. 사실 태준은 오랜만에 잔뜩 취해 모든 게 흐물흐물 해져 있었다. 혓바닥도 그러했고 팔도 그러했고 몸도 그러했다. 몇 분 가량 선우만 빤히 보고 있던 태준이 만족한 듯 웃어보이며 푹 쓰러졌다.
그와 같은 일이 몇 번쯤 더 반복됐다. 태준이 요구(?)하는 바는 늘 비슷했다. 다른 사람한테 눈길 주는 거 싫다, 그런 눈빛 하지 말라, 자기만 소중하게 생각해달라. 선우는 내내 답도 없이 태준을 지켜만 보다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네가 뭔데?”
역시 취해서 풀려 있던 태준의 눈빛이 더 기가 죽었다. 반박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태준의 일방적인 집착들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선우가 말을 이었다.
“특별해지고 싶으면 그럴 자격부터 되던가.”
“...네?”
“연애하자.”
연어먹자, 하는 말처럼 단조로운 어조였다. 태준은 술이 단 번에 깨버린 듯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선우는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재방송은 없었다. 태준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선우의 놀고 있던 손을 슬쩍 잡았다. 선우가 힐끗 태준쪽을 한 번 보았지만 별 말이 없었다. 태준은 선우의 입가에서 술잔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볼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다시 힐끗 선우의 시선이 태준을 향했다. 눈이 마주쳤고, 태준이 잡고 있던 선우의 손이 태준을 잡아 끌고는 태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렇게 연애가 얼렁뚱땅 시작됐다.
연애를 시작하고서도 선우는 공과 사가 철처했다. 여전히 계속되는 연기 지도에는 애인이 아닌 선배로서 태준을 대했다. 태준이 네네 선우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손이 자연스레 선우의 허벅지를 짚고 꼬물꼬물 바지의 찢어진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넣는데도, 선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공공장소나 일 이야기를 할 때 그러면 가볍게 손등을 때리거나 팔을 빼면서 단호한 얼굴로 안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둘이 있을 때는 태준이 허리를 잡든 손을 잡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단 점이 조금쯤은 애인같은 점이었겠다. 물론 선우가 먼저 태준을 향해 손을 뻗는 경우도 좀 늘어 있었다.
선우는 태준의 볼이나 머리를 만지는 걸 좋아했다. 특히 머리를 자주 쓰다듬었는데 그래서 선우와 만나는 날이면 늘상 태준의 머리가 헝클어지곤 했다. 태준은 말로는 “아 머리 망가져요.” 하면서 투덜거렸지만 거부는 하지 않고 얌전히 선우의 손길을 받았다. 하도 매번 그러니까, 스케줄을 가기 전에 선우를 만나게 된 날은 태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
“볼. 볼해줘요.”
선우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태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문득 볼에 뽀뽀를 했다. 태준이 깜짝 놀라며 굳어버렸다. 보통 선우보다는 태준이 먼저 스킨십을 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태준은 본인은 선우를 서슴없이 만지고 주물덕대면서도 선우가 먼저 하는 스킨십에는 그리도 매번 깜짝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볼에 해달라며?”
“뭐, 그, 어, 으…”
여유로운 말투로 답하며 웃어보이는 선우에게 태준은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 하고 얼굴을 붉혔다. 누가 보면 뽀뽀를 처음한 사람 같을 정도의 반응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깊은 스킨십과 함께 뜨거운 밤을 바로 어제 만들었기에 선우는 참 어이없어 했다.
“이보세요 남태준씨. 내 허리 아작낸 건 여기 계신 남태준씨가 아닌가 봅니다?”
태준은 여전히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다가 양 팔로 가득 선우를 끌어안았다. 조용한 가운데 맞닿은 곳으로 심장 소리가 울렸다. 이제 좀 진정이 됐던지 태준이 선우의 귓가에 다녀올게요 작게 속삭이고는 귀 끝을 살짝 깨물었다 놓았다.
그렇게 태준이 스케줄을 하러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았다가 선우로부터 메세지가 한 통 날아왔다. 선우가 괜한 용건으로 그런 다급해 보이는 메세지를 보내는 타입이 아닌데 스케줄 끝나고 바로 XX로 오라고 해서, 태준은 끝나자마자 정말 급하게 선우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태준이 도착하자 마자 선우는 태준의 머리를 잔뜩 망가트렸다.
“아씨 뭐에요? 뭐에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 선우가 투덜거리는 태준의 헝클어진 머리를 더 손으로 부비며 말했다.
“넌 이게 나아.”
“...다녀왔어요.”
“응.”
태준은 제 겉옷을 벗고 선우를 또 끌어안았다. 선우는 본래 전체적으로 체온이 좀 낮았다. 반면 태준은 열이 많았고. 이런 겨울엔 실내에서 태준을 기다리던 선우가 더 따뜻할 법도 한데 아니었다. 태준은 선우에게 “내 체온 나눠줄게요.”하고 더 바싹 붙었다. 옷을 입고 있으나 벗고 있으나 늘 그랬다. 선우도 태준을 마주 안아왔다. 따뜻한 겨울이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었다. 애초 친해지게 되며 마음을 연 신호탄이 술이었던 것도 있었고, 함께 술을 마시며 태준은 평소보다도 더 표정도 다양하고 감정 표현에도 솔직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는 좋아하지 않고, 회식같은데도 잘 나가지 않았으나 선우 앞에서는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태준은 취하면 혀가 풀린 채로 정말 아무말을 내뱉었다. 쌩뚱맞게 집에 불을 켜놓고 왔다고 걱정하거나 이번달에 개봉하는 영화가 20개가 된다고 하거나 별 소릴 다 하며 말이 많아졌다. 반면 선우는 술이 들어가면 더 조용해지는 편이었다. 늘 미소 띤 얼굴이 베이스인 사람인데 무표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화나가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그만큼 표정에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풀리는 자리인 거였다. 말이 많아진 태준을 가만히 바라보며 구경하다가, 태준이 만지작 거리는 걸 내버려둔 채 술을 마셨다. 가끔은 귀찮아하며 못 만지게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태준이 좀 많이 취한 날일 때가 태반이었는데, 슬금슬금 제 옷 속으로 들어 오는 태준의 손에 선우가 명령조로 손 가만히 있어 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는 듯이 태준이 절망 어린 얼굴을 하고 선우의 옷 속에서 빼낸 손가락 끝만 꼼지락 거리고 있으면 선우가 태세를 전환시켰다.
“넌 나 만지지 마.”
술에 취하면 시키는 건 그대로 잘도 따르는 태준의 주사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선우의 말 한마디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태준을, 선우가 부러 태준이 예민한 곳만 집요하게 건드려댔다. 손길에 어쩔 줄 몰라하는 태준에게 짧게 키스한 선우는 그곳이 둘만 있는 공간이긴 해도 술집이라 더한 행위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자리를 그만 정리하자 했다.
“태준아 집에 가자.”
태준은 역시나 술에 취해 있는 상태이기에 비척거리며 선우가 말하는데로 했다. “가방 들어”라는 말에 가방을 들었고, “옷 챙겨 입고”라는 말에 주섬주섬 옷도 챙겨 입었다.
“옷 다 입었어? 손. 착하다. 여기 뽀뽀.”
순순히 선우에게 손을 내미는 태준을 끌어다가 뽀뽀까지 시키고선 잘했다며 쓰다듬은 선우는 태준을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또 뜨거운 밤을 보냈다.
선우는 자주 태준과의 잠자리에서 태준의 몸이 예쁘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키 큰 건 좀 아쉽지만 작은 것보다는 낫지 라는 말을 꼭 한마디씩 덧붙이면서. 연기하기 좋은 몸이라는 계속 된 칭찬과 함께 선우가 태준의 몸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면 쑥쓰러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툴툴거리는 태준이었다. 몸 때문에 만나느냐면서. 선우는 태준의 물음에 딱히 대답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치만 태준 역시도 선우의 잔상처 하나 없이 관리를 철저히 잘 한 배우몸 그자체인 몸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그리도 자꾸 선우의 몸으로 손이 갔던지도 모른다. 근데 선우는 그 예쁜 몸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에 비해 노출을 참 안 했다. 대체로 입는 옷들도 긴팔과 긴바지였다. 더운 여름 날씨때도 대부분말이다. 한 번은 태준이 궁금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노출을 꺼리는 거야?
“부끄러워~”
선우가 한껏 꾸민 미소를 짓고 대답하는 말에 태준은 절대 신뢰가 가지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며 콧방귀를 뀌었다. 둘만 되면 맘껏 벗어던지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그 대답을 듣게 된 후 잠자리를 갖게 됐을때 태준이 마침 기회다 싶어―매번 본인만 놀림을 잔뜩 당하는 입장이니― 선우를 놀려먹기 위해 “아~ 노출 부끄러우신 하선우 배우님?” 하고 한 마디를 했다가 선우가 도로 옷을 입어서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당황스러워 하는 태준에게 선우가 말했다.
“난 부끄러우니까 대신 네가 벗어^^”
그렇게 그날은 태준만 벗은 채로 했다. 선우는 다 갖춰입은 채 나체의 태준에게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평소보다 배는 더 쑥스럽고 어딘가 부끄럽기 짝이 없어, 자꾸만 팔로 제 얼굴을 가리며 태준은 생각했다. 절대로, 절대로, 본인은 선우를 이길 수 없다고.
선우가 새 작품을 들어가게 됐다. 출연진들도 꽤나 빵빵한 떼주물 느와르 영화였는데, 역 자체는 좀 작긴 하지만 후반부 내용에 굉장한 임팩트가 있는 역으로 태준도 함께 섭외가 되었다. 물론 선우가 충분히 추천을 하면 추천을 할 수도 있을 위치였지만 그 역은 온전히 태준이 오디션으로 따낸 역이었다. 선우는 태준이 오디션에 통과했다고 알리자 또 머리를 잔뜩 헝클어주었다.
비록 같은 작품을 하게 되었지만 두 사람이 촬영장에서 만나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주연인 선우는 분량이 많았고 태준은 분량자체가 적기도 했지만 선우와 부딪히는 장면이 없다시피 했다. 워낙 공과 사를 철저히 잘 구분하는 선우이기에 그 얼마 안 되는 마주침에서도 태준에게 그저 간단한 인사 정도만 건네고 말았다. 나름 선우와 촬영장에서 만나 몰래 연애질을 할 기대가 조금 있던 태준은 약간 서운했다. 물론 일은 일인 거 잘 알지만.
“선우씨는 애완동물 안 좋아하시나요?”
촬영이 막바지를 향해가고, 배우들과 스탭들이 다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아직 촬영분이 남은 사람들도 있어서 뒷풀이까지 하기엔 너무 거창해서 마지막까지 힘내자는 취지였다. 태준은 옆 테이블의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는 선우를 힐끔 보았다. 제 옆자리에 있던 한 스탭이 선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창 그쪽 테이블이 동물 이야기로 화제를 이어가다 던져진 질문인듯 했다.
선우는 본래 동물에 큰 관심도가 없었다. 태준의 집에 올 때도 금이를 힐끔 보고 고양이네,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금이도 제 집사가 누구를 데려왔구나 하고 힐끔 보고 제 지정석으로 도도하게 걸어가 누워서, 서로 데면데면한 게 웃겼던 걸 떠올리며 태준도 은근히 선우의 답을 기다렸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거 같다가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뇨, 개는 좋아하는 거 같아요. 엄청 큰 대형견.”
선우의 시선이 태준을 향해서 눈이 순간 마주쳤다. 태준은 잔을 입에 대고 있다가 순간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뭐지, 설마 아니겠지. 태준이 선우를 다시 쳐다보니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선배. 개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계속 신경이 쓰여서 선우가 화장실을 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쪼르르 뒤쫓아 겨우 둘이 되었다. 대뜸 선우를 붙들고 묻는 태준의 얼굴엔 설마 하는 불안한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선우는 태준의 물음에 딱히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빙글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너무 명백했다. 태준은 별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순식간에 얼굴이 뜨겁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 진짜, 선배, 사람을 개취급… 하.”
태준이 심통을 내자, 웃고 있던 선우는 손을 뻗어 태준의 볼을 문질거렸다. 어휴 우리 멍멍. 머리도 또 쓰다듬기에 태준이 아 왜요 머리 망가져요, 하고 불퉁한 소리를 냈지만 선우의 손을 치워내진 않았다.
보통 선우가 태준을 부를 때는 너, 남태준, 후배님, 남들 앞에서는 태준씨 라는 호칭을 부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치만 태준은 아주 가끔 저와 있을 때만 드물게 툭툭 내뱉는 멍멍―어떤 때는 멍뭉― 같은 호칭을 꽤 좋아했다. 선우에게 좋다고 말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도리어 싫어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텐데 선우가 그 호칭을 매일 썼다면 이토록 애착심이 가진 않았을지도. 이렇게 선우가 아주 가끔씩 한 번 툭 던지는 게 애정이 담겨 있다고 느껴졌고, 그래서 태준은 쑥스러워하면서도 거기서 선우에게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이따 끝나고 선배네 가서 같이 영화 볼까요?”
“영화 보려는 거 맞지?”
“다른 것도 원하면 뭐.”
태준이 빙긋 웃어보이며 선우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선우는 자연스레 곧장 태준을 밀어내며 떨어졌다. 여긴 밖이었고 동료들도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회식자리였다. 선우의 선긋기에 태준이 알면서도 또 서운해졌다. 그런 태준의 귀에 선우가 작게 속삭여왔다. 집에서 기다려라 멍멍아. 태준은 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뭐 봐요?”
막 씻고 나온 태준이, 먼저 씻고 침대에 누워 폰으로 뭔가를 보며 웃고 있는 선우의 옆에 앉았다. 뭔데 그러지 싶어 힐끗거리며 뭐 보냐 물으니 선우가 너도 볼래? 하면서 제 폰을 태준에게로 선뜻 건넸다. 선우가 보고 있던 건 어떤 영상이었다.
<태준아 겉옷 입어야지. 응, 단추도 다 끼고. 잘했어.>
목소리만 들리는 선우가 말하는대로 화면 속 태준은 순순히 따랐다. 술에 잔뜩 취한 태준의 모습이었다. 태준이 얼굴을 확 붉히며 “아씨, 이건 언제 찍었어요? 지워요!” 하는데도 선우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음 영상을 재생시켜보였다.
“너한테 허락 맡았는데.”
<나 영상 찍어도 돼?>
두번째 영상 속 태준도 여전히 잔뜩 취해 있었고 선우가 묻는 말에 태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락’을 하고 있었다. 선우의 치밀함에 태준은 반박을 못 하고 그저 우씨 하며 제 입술을 깨물고 선우의 폰을 제법 거칠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아주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선배만 봐요….”
“싫은데? 같이 봐. 여기 진짜 웃겨.”
선우는 태준을 단단히 더 놀리고 싶었던지 웃으며 다시 영상을 리플레이하며 태준에게 영상을 들이밀었다. 태준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다가 폰을 확 빼앗았다.
“그만합시다 하선우씨-”
순식간에 선우를 침대에 눕힌 태준이 그의 귀에 조용히 읇조리며 허벅지를 더듬어왔다. 선우가 픽 웃었다. 그리곤 태준의 쇄골쪽에 있는 점을 손 끝으로 쓰윽 선을 이어 그리듯 눌렀다. 그리고 동작이 이어지며 태준의 목을 쓸어올리듯 터치했다. 태준이 헉 하고 달뜬 숨을 내뱉었고 선우의 허벅지를 만지는 손길이 더 안쪽을 파고들었다. 차근차근 상대의 옷을 벗겨내고 혀를 섞어 입을 맞추고 몸을 맞대며 뒤엉켰다.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서로를 탐했다.
몇 번 체위를 바꿔가며 하고 나니 선우가 먼저 침대 위로 거친 숨을 몰아내쉬며 나가떨어졌다. 체력의 문제였다. 그러나 아직 태준은 멀쩡해서 한 번 더 하자며 선우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만하지?”
선우는 진심으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준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선우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럼, 만지면서 자면 안 돼요…? -하..알아서 해. 선우는 체력이 방전됐던지 태준이 끈임없이 만져오는데도 그걸 제지할 힘도 낼 수 없어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태준은 잠든 선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확인하고 난 후에 미소를 띠며 선우를 그대로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정말로, 너무 좋았다.
* * *
“데려다줄까?”
값비싸고 귀한 음식임에도 흙을 씹어먹은 것처럼 입 안이 텁텁한 채로 밖으로 나오니, 제법 날이 어두컴컴하게 저물어 있었다. 태준은 선우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제겐 익숙한 선우의 차가 보이는 곳으로 먼저 성큼성큼 걸었다. 선우가 뒤에서 리모컨으로 차의 잠금장치를 먼저 풀어두었고, 태준은 앞서 걸어가 조수석 차문을 열고 먼저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는 선우의 향이 가득했다. 태준은 선우가 차문을 열때까지 꼼짝않고 몸을 경직한 채 앉아 있었다. 곧 문이 열렸고 선우가 운전석에 올랐다. 태준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차의 시동이 걸렸다. 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담하게 운전만 했다. 태준은 제 손등으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울었다. 차는 태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지금 뭐라고 했어?”
그건 정말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태준도 분명, 언젠가는 둘의 사이가 누군가에게 들킬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우와 결코 헤어질 것은 예상한 적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이 생겨도 어떻게 해야할까 함께 뭐라고 말을 맞출까 어떤식으로 대처하면 좋을까, 함께- 그것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선우는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처럼 꽤나 단호한 어조로 ‘헤어지자’고 말해왔다. 실장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버렸고 그게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선우만 불러다가 사장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태준은 알 수 없었다. 태준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분명 선우가 태준보다 삶의 경험과 연예계의 경험이 풍부한 선배이자 연장자여서기도 했겠지만, 어떤 이야기를 해서 선우를 설득하려한 게 분명했다. 솔직히 선우가 설명한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아마도 지금은 나름 ‘내부자’에게만 걸린 듯 하지만 언제 또 누군가 ‘외부’에게 걸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으로선 치명타일 것이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을수도 있었다. 이해는 한다.
“몰래 하면 되죠. 안 들키면 되잖아요.”
이해는 하지만 심정적으로 쉽게 헤어지는 선택지 밖에 없단 건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우는 이미 마음을 결정한듯 단호했다.
“퍽이나 안 들킬 수 있을 거 같지?”
차가운 말투였다. 이토록 차갑게 말하는 선우는 오랜만이었다. 태준은 선우의 그런 태도에 더욱 울컥했다. 하지만 선우의 독설은 계속 이어졌다. 니가 어려서 뭘 모른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지금 감정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아니니 잘 판단해라. 태준은 더 매섭게만 쏟아내는 선우의 말이 더 듣고싶지 않아서 그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입을 입으로 막았다.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이에 부딪혀 어딘가가 터졌는지 싸한 피맛이 느껴졌지만 태준은 떨어지지 않았다. 선우는, 태준이 하는데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태준이 혼자 아둥바둥거리다 지쳐 떨어질 때까지.
“......”
“이제 됐지?”
태준이 떨어지자 만지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싸늘한 표정을 한 선우가 제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태준은 쿵 하고 무언가가 저 발밑으로 떨어져 내린 것 같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골이 울렸다. 가만히 태준을 보고 있는 차가운 선우의 눈빛이 계속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 피를 본 게 저였던 모양이다. 기분 나쁘게 피맛이 또 확 입 안을 메웠다. 어느새 쥐고 있던 손은 손톱자국이 팰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태준은 그대로 있었다. 더 화를 내거나 발악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충격을 받은 채로 서 있었다. 시선도 선우의 저 너머 어딘가를 멍하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선우는 그럼 이만 간다, 하는 짧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태준을 스쳐지나가 버렸다.
태준은 집에 돌아가 하늘이 무너진듯 목놓아 울었다. 평소 태준이 불러도 잘 오지도 않던 금이가 먼저 태준에게 다가왔고, 태준은 금이를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제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을 고갈시킬 정도로 한참을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깨어나고도 태준은 이별을 실감하지 못 했다. 그래서 또 울었고, 그러다 다시 잠이 들었다. 스케줄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도무지 제대로 된 생활을 할수 있을 거 같지가 않은 며칠간이었다. 선우에게 연락도 못하고 있었다. 또 거부당하면,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땐 정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태준은 아 어떻게 해도 선우가 마음을 안 돌리겠구나 하는 걸 체감하고서야 겨우 발을 떼어 걸었다. 밥도 먹지 못 하고 울기만 했던 탓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선우를 힘겹게나마 다시 찾아갔다.
“알았어요.. 헤어질게요. 헤어지면 되잖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태준은 꾹 참고 선우가 문을 열자마자 제가 다짐한 말을 내뱉었다. 선우는 더 이상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얼굴을 한 채 “그래. 마지막으로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하고 말했다.
* * *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울기만 하던 태준은 창 밖으로 종착지에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선우의 차는 늘 멈추어 서던 곳에 부드럽게 멈추었다.
“...잘자.”
선우는 태준을 집에 데려다주고 헤어질 때면 늘, “들어가서 연락해, 잘자.” 하고 말하면서 손을 뻗어 태준의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더 이상 그의 손은 태준의 머리를 만져주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은.
태준은 눈물을 다 닦아낸 얼굴을 선우에게로 돌렸다. 선우의 얼굴이 시야에 한껏 담겼다. 태준은 잠시동안 선우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말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 끝이 떨렸지만 문은 단 번에 열렸다. 문을 닫을 때조차 태준은 더 이상 선우를 바라보지 않았다. 쿵, 차문이 단단하게 닫혔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제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연애가 끝이 났다. 태준은 미련이 제 발목을 붙들까봐 빠른 걸음으로 차로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온 신경은 이미 그곳에 붙들려 있었고 멀어질 수 없었다. 집이 가까워갔지만 뒤에서 시동이 걸리는 소리는 한참을 나지 않았다. 그래도 태준은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무척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오는 길에 모두 쏟아내서인지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다.
헤어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