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수고했어요
Scene

선우의 연출작은 대부분이 창작극이었다. 그래서 공연 대부분이 규모가 작았지만 그럼에도 연출가가 선우이기에 축하의 규모는 제법이었다. 동료 연예인들이 관람을 오기도 했고 관객들은 몰렸으며, 팬들이 축하 화환을 보내 복도에 줄지어 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축하 대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건 역시, 선우에게 직접 배달 되는 거대한 꽃다발이었다. 어느 시기부턴가 시작된 그 꽃배달은, 매 작품마다 첫공과 막공때면 어김이 없었다. 선우와 작품을 같이 만들어가는 동료들은 주기적으로 보는 그 꽃다발을 보며 보낸 이에 대해 추리를 하기도 했다. 아무도 맞출 수는 없었지만 어찌보면 소소한 재미 요소였다.


"이번 공연에도 화려한 게 배달 왔네요."

"이게 소문의 '그건'가요?"

"자긴 첨 보던가? 이게 '소문의 그거'야."

"진짜 엄청 대단한 팬인가봐요. 정성이다~"


선우를 찾아 온 꽃 배달원은 근거리에서 숙덕거리는 이들의 감상평을 즉각으로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어쩌면 실제로 입꼬리가 올라갔을지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헬멧을 쓰고 있으니 그들은 이 꽃 배달원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리 없었다. 배달원의 정체 역시도. '소문의 그거'라는 그 거대 꽃다발을 선우에게 보내는 당사자가 직접 배달을 오리라곤 전혀 모를 것이다. 물론 그건 선우도 모를테다.

태준은 선우의 일터에 침투해 제 발로 당당히 선우의 앞에 서서 한 품에도 벅찰 큰 꽃다발을 내밀었다. 선우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환하게 웃음꽃을 피웠다. 제 앞에 당사자가 있는 줄은 몰라도, 꽃을 보낸 이 열렬한 하선우의 팬이 누구인진 알고 있을 테니까. 태준은 헬맷 너머로 바라보는 선우의 행복한 미소에 저도 함께 행복해졌다. 그렇지만 말문을 열 수는 없어서, 배달 임무를 완료한 배달원은 그대로 묵묵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꾸벅 인사를 전하고 나오면서,선우가 '배달원'의 정체를 알게 될 때를 상상하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태준은 잔뜩 두근거렸다.


선우가 첫작품을 올렸을 땐, 둘은 단순한 선후배 관계였었다.―물론 태준이야 팬으로든 섹슈얼하게든 여러모로 선우를 홀로 좋아할 때였지만― 그래서 그땐 지금과 달리 그냥 평범하게 공연만 보았고, 가져 온 작은 꽃다발을 스텝측에 전해달라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선우가 연출작에 대한 경력이 쌓이는 동안 태준의 위치도 변화무쌍했다. 두 사람은 연애를 했고, 이별도 했으며, 다시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태준이 선우를 공식적으로 만나는 건 어디까지나 선후배로서만이 가능했다. 그래서 꽃은 성대하게 주고 싶지만 직접 전해준다면 시선을 끌수밖에 없어 생각해낸 계책이, 바로 이 '배달원'이라는 역할이었다. 대사 한 마디 없는 역할이지만 태준은 이 역할이 무척 재미있고 좋았다. 매번 일회용으로 빌려 쓰다 이번에 아예 장만해버린 헬맷도 마음에 들었고. 반전도 있고 말이다. 태준은 만족감에 반질거리는 제 헬멧을 쓰다듬었다. 이제 다른 역할로 변할 차례다. 태준은 화장실에서 남몰래 배달원의 옷을 벗고 관객1로 변신했다.

이번 작품은 선우가 시나리오도 쓴 극이었다. 선우의 작품은 늘 태준을 만족시켜왔지만 더더욱 기대되는 것이다. 들뜬 마음을 꾹 누르며 관객1이 된 태준은 공연장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일부러 극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입장하고 자리도 뒷자리로 잡았다. 혹여라도 태준을 알아보는 이가 생기면 공연 시작 전에 괜히 소란을 일으킬 것이 싫기도 하고 태준 역시도 온전히 극을 보는데에 집중할 수 없는 건 싫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관객1 모드가 된 태준은 막이 오르면서부터 정신없이 무대 위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




선우는 늘 집안 가장 잘보이는 곳에 받은 꽃다발을 장식해 놓곤 했다. 이번의 화려한 꽃들도 선우의 집 인테리어로 추가 되었다. 태준은 선우의 뒤에서 허리를 감싸안으며 "마음에 들어요?"하고 물었다. 선우는 작게 응, 하고는 고개를 돌려 태준에게 뽀뽀했다. 쪽 하고 짧게 떨어지는 게 아쉬워 태준이 한 번 더 짧게 입을 맞췄다.


“어땠어?”

“말로 표현 다 못할 정도로 좋았죠.”

“그래서 그렇게 울었어?”

“...어떻게 알았어요?”

“사진 찍혔더라.”


헉 안 들켰을 줄 알았는데. 중얼거리는 태준의 배를 툭 치며 선우가 웃었다. 이전에도 태준은 몇 차례 선우의 영화를 보러가서도 울던 사진이 찍혔었다.


“근데 이건 뭐….야?”

“아.”


태준이 그냥 둘레둘레 들고 온 헬멧 외 기타 변장에 썼던 옷이 담긴 짐을 소파 옆에 놔뒀더랬다. 소파에 가서 앉으려던 선우가 짐을 발견하곤 헬멧을 꺼내들었다. 태준을 한 번 쓱 보더니 헬멧을 든 채로 고개를 기울이며, 표정이 묘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타이밍이긴 했지만, 태준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언제든 밝히려고 했던 사실이기에 별 망설임 없이 헤실 웃으며 사실을 고했다.


“응, 나에요.”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거야.”

“인터넷에서 샀죠.”


선우가 푸흐흐 웃음을 터뜨리며 헬멧을 직접 써보았다. 신기하단 듯 헬멧 쉴드를 올렸다 내렸다 딸깍거려도 봤다. 태준은 헬멧을 잡고서 열린 쉴드로 드러나 있는 선우의 콧등을 살짝 깨물었다. 곧 헬멧을 벗으며 선우는 태준의 어깨로 제 손을 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고마웠어, 꽃.”

“앞으로도 계속 배달 갈 거니까요.”

“벌써 기대되네, 그 꽃 배달원.”


태준은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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