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사자들
Scene

‘사자들’을 촬영하는 동안 태준은 최효진으로 살았고, 서진욱으로 사는 선우를 영화 속에서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하고 기대는 동료이자 선후배로 자연스레 대할 수 있었다. 그러자니 그들의 사이가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참 행복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이제 막을 내릴 시간이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 변호사님. …...잘가요, 형.’

‘고생했어, 최변. …...잘가.’


내밀어진 태준의 손을 잠시 꽉 맞잡았다 놓으며 떨어진 선우의 온기가, 금방 아쉬웠다. 태준은 또 선우와 헤어진 것만 같았다. 

이제 일을 핑계로도 선우를 마주할 수 없었다. 물론 영화가 개봉하게 되면 그때대로 몇 가지 스케줄은 진행되겠지만 그땐 남태준과 하선우로 마주해야 했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서로의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처럼, 그 무덤덤한 사이로. 

그래도 다행인 것은 헤어진 지 1년은 족히 넘었지만,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잔여물들을 하루빨리 처리해야만 한다는 조급함은 버릴 수 있게 됐단 점이었다. 본인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선우도 힘들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으니까. 어딘가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그를 다 떨쳐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감정을 무뎌지게 했을까. 영화제 참석을 위해 선우를 다시 만났을 때 태준은 제법 아무렇지 않게 남 대하듯 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연기력이 많이 늘었구나 하고 자화자찬을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실제로 ‘사자들’ 개봉 이후 연기력이 늘었단 평을 주변에서 많이 듣고 있었다. 최효진을 연기할 때의 감정은 연기라기엔 진짜가 섞였으니 당연했겠지마는.

그렇지만 그 연기는 그만 숙소 배정에서 흔들려 버렸다. 아무래도 해외 영화제 스케줄이라 팀으로 움직여야 했고 스태프도 최소의 인원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1인 1실은 사치란 건 알았는데, 그렇다고 2인 1실을 선우와 쓰게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배정받은 상황에서 방을 바꾸자니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봐 어쩔 수 없이 선우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방은 두 사람이 쓰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고 침대도 각각 한 개씩 마련되어 있었다. 테라스도 딸린 방이었다.


“와인 한잔할래?”


오랜 비행으로 지친 몸을 따뜻한 물로 샤워하며 풀고 나오니 먼저 씻었던 선우가 제 짐 정리는 다 끝났는지 방에 비치되어 있던 와인병을 들어 보였다. 선우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권유하는 것에 태준은 조금 황당했지만, 어쨌든 선배가 권유하는 것이고 거기다 좋은 일로 온 해외에서 창밖의 분위기 있는 야경을 보며 와인 한잔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아서 자연스레 선우를 따라 테라스로 나섰다. 테라스는 애초 그런 자리를 위함이었는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뭔데요?”

“와인이잖아?”


태준이 불퉁하게 물으며 잔을 받아들자 선우는 뭘 묻냐는 듯이 반응했다. 그리곤 자기 잔을 태준의 잔에 부딪혔다.


“이왕 온 거 제대로 즐겨야지.”


그의 웃는 모습은 여전히 소년같이 화사했다. 호텔 가운을 입은 게 갭이 느껴질 정도였다.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꽤 행복한 순간이었다. 비록 불편한 관계지만 함께하고픈 사람과 함께 하는, 다신 없을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칸 출신 배우가 됐네?”

“그러게요. 저 급 많이 올랐죠? 이제 그만 하산할까요?”


아주 잠시는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도 들었다. 두 사람 사이로 오가는 가벼운 농담들은 그런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술은 분위기를 무르익게 했다. 자연스레 옛날이야기도 하나둘 꺼내졌다. 남태준 용 되긴 했지. 너 처음 연기 봤을 땐 정말… 아, 그만 해요. 흑역사야. 선우는 태준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태준이 꽤 버벅거리던 그 예전의 대사를 따라 읊기도 하고 어이없던 에피소드도 꺼내 들었다. 태준은 선우의 공격들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으윽 거리다가 결국 선우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기에 이르렀다. 눈이 마주쳤다. 아… 그만 한순간에 뻘쭘해져 버렸다. 태준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이제 그만 자요. 내일 일정 빡빡할 텐데.”


조용해진 테라스에 달각거리며 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문득 태준의 손을 선우가 감싸 쥐었다. “남태준.” 차분히 뱉어진 제 이름이, 저가 남태준이었다. 선우가 불렀다. 저를. 태준은 가만히 보고 있는 선우의 눈과 시선이 얽히자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고동이 빨라졌다.


“뭐, 왜 왜요.”


쓱 손을 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진정할 수 없었다. 술 때문일까,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아냐, 자자. 늦었네.”


선우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 잠시 침묵하다 먼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먼저 주무세요…” 하고 선우의 뒤통수에 인사를 마친 태준은 털썩 도로 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선선했다. 조금, 진정이 필요했다. 손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분명 제 손을 감싸 쥐는 선우의 손은 따뜻했는데. 그치만 빼버린 게 맞아, 이게 맞아. 태준은 애써 제 맘을 추스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선우는 이미 제 침대에 돌아누워 있었다.


“근데, 무슨 할 말 있으셨어요?”

“별거 아니었어. 불 끄자.”


선우는 누운 채로 손을 휘젓고 말았다. 태준이 불을 끄자 침대 옆 작은 스탠드의 불빛이 옅게 방안을 비추었다. 태준은 선우가 계속 신경이 쓰였지만, 더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고 물어보기도 무서웠다. 지금 잘 포장되어 괜찮아 보이는 이 관계를 잘못하다 터뜨려 버릴지도 모르는 게, 두려웠다. 마치 잔에 꽉 채워 찰랑거리는 물 같았다. 한 방울이라도 자칫 잘못 떨어트리면 넘쳐버리고 말 것이다. 

태준도 제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거리며 선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눈 안에 담았다. 이게, 맞지. 응. 이게 맞아. 몇 번을 저 스스로 다짐시키고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심란한 밤이었다.






“술이 좀 과했던 거에요? 이제 나이가 좀 더 먹으셔서 힘드신가 봐요.”


아침이 되고, 태준은 선우가 피곤한 기색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며 농을 던져 나름 어색해진 분위기를 희석하려 애썼다. 선우는 아침 식사보단 잠을 더 택할 모양인지 손을 휘적거렸다. 태준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식을 마치고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는 선우에게, 챙겨 온 간단히 먹을만한 요깃거리를 건넸다.


“일정하시려면 좀이라도 챙겨 드시죠?”

“고맙다.”


선우는 태준이 주는 것을 받으면서 얼굴을 스윽 돌렸다. 방 안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어색할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어제 한순간은 정말 괜찮았는데. 이렇게 계속 농도 치고 서로 편한 사이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순간 생각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이 묘한 어색함에 숨이 막힐까 봐 태준은 서둘러 준비하고 먼저 방을 나섰다. 전달받기로 공식적인 일정이 꽤 빡빡한 날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어색할 틈이 없을 정도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질 것만 같은 생각을 애써 떨쳐내려 하지 않아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니까.


다만 저녁 느즈막히가 돼서야 끝난 일정에, 감독은 이제 여유 시간이 좀 되니 영화제 내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좀 보고 오라며 두 주연 배우를 떠밀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일정이 있는 듯해서, 두 사람에게만 주어진 시간이었다. 태준은 어색함이 감돌까 봐 서둘러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감독의 말에 따라 영화 보기를 선택한 건, 영화를 보는 동안은 특별히 대화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꽤 괜찮은 선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 영화 볼까요? 어때요? -그래, 그럼.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냥 아무렇게나 골랐다.


영화는 내내 조용하고 고요하고 잠잠했다. 어떤 예술적인 정신을 필름에 담아내고자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영화가 아니라 해도 태준의 머릿속에 영화의 내용이 들어올 순 없었을 거다. 옆에 담담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선우가 계속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태준은 힐끔 제 옆을 돌아보았다. 언젠가와 언젠가에 늘 보았던 모습이었다. 함께 영화를 보다가, 선우를 보고 있으면 선우도 돌아보며 눈이 마주쳤었다. 그럼 서로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손을 맞잡은 채로 영화를 보았었다. 또 살짝 이마에 입을 맞추기도 했었다. 그런 추억들이, 선우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영화의 빛 사이사이로 흘러 지나갔다. 태준은 순간 제 손등에 물방울이 뚝 차갑게 떨어짐을 느꼈다. 어? 저도 놀라 눈을 만지니 축축이 젖어 있었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스크린으로 시선을 박았다. 한 번 흘러넘치기 시작한 감정은 멈출 줄 몰랐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옛 감정이 선우와 함께 했던 많은 시간들을 상기시켰다. 마치 그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다른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위로 그리운 시절이 역순으로 떠올랐다. 돌고 돌아가, 한창 선우와 거리감이 가까워지며 연기를 배우던 시절까지 갔다. 딱 그때처럼만 돌아간다면. 어제 잠깐은, 그렇게 되면 좋을 것만 같았다.

한데, 아니다. 그 시절에도 어느 순간부터 힘들면 선우를 떠올렸고 기쁜 일이 생길 때도 선우에게 가장 말하고 싶었다. 그땐 그게 존경심의 일부일 줄 알았지만, 물론 그것도 맞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미 감정의 씨앗이 싹을 트고 있던 것 같다. 그래서 돌아가도 어차피 마찬가지 일 거다. 남태준은 온통 하선우의 생각으로 가득 찰 거고 결국 그를 사랑하고 말 거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와 선우는 “영화 좋았어?”하고 물어왔다. 태준은 아 네 뭐.. 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 공간을 벗어나려 애썼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돌아가죠.”

“어차피 다들 바쁠 텐데…. 그래, 가자.”


다시 팀 사람들과 합류해서 내일 일정에 대해 간단히 전해 듣고 해산하게 되었다. 태준은 이걸 간과했다. 어차피 모든 일정이 다 끝나고 나면 둘만 남게 되는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들 아 피곤하다 하면서 뿔뿔이 각자 갈 곳으로 흩어지는데 태준은 약간 머뭇거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방을 가지 않는다면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없었다. 그 막막함에 어찌할지 모르고 있을 때 선우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먼저 들어가. 나 감독님이랑 더 이야기 좀 하고 갈게. 먼저 자고 있어.”


선우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준은 그저 다행이란 생각에 네 하고 대답한 채 선우의 말대로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고, 그가 오기 전에 후다닥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다행히 일정이 곤하긴 했던 모양인지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준은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 새벽 어느 때에 잠시 눈을 떴다. 사방은 온통 깜깜했다. 그래도 옅게 창으로 새어들어 오는 빛에, 옆 침대가 비어 있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선우가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좀 의아했다. 그러나 그 의혹이 아침에 일어나서까지도 부재한 선우의 침대를 보곤, 이상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건 정말 이상한 감정이었다. 


태준은 하루빨리 선우를 잊고 털어내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선우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 거리는 제가 못나 보였고, 답을 받지 못하는 그 감정을 간직해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준은 선우가 막상 멀어져간다 생각하자 어떤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만 같이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허전한 사이로 스며든 건...


그래서, 일정을 시작하고서야 마주친 선우에게 “다른 방 가서 민폐 끼치고 불편하게 잤어요?” 하고 툭 던졌다. 목소리는 애써 농담을 던지듯 꾸며냈지만, 말투 끝에 슬쩍 까칠함이 담겼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감독님 나 좋아해. 감독님!! 저 좋아하죠??”


앞서있던 감독님은 영문도 모르는 채 선우가 크게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어, 사랑하지~” 라고 답해왔다. 두 사람이 ‘사자들’을 작업하기 전부터도 친분이 있던 관계인 건 알고 있었으나 태준은 괜히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약간은, 자신은 장난으로도 지금은 말 못 할 소리를 하는 것이 부러웠던 것도 있었겠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크게, 어떤 의문이 들었다. 왜 첫날에는 갑자기 손까지 잡아서 사람 심장을 가만두지 않더니 이제 와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건지. 아무렇지 않음을 넘어서 도리어 피하는 것 같은지. 종일 선우는 감독님하고만 붙어 다니며 명백히 태준을 피하고 있었다. 분명 태준도 어제 그를 피하고픈 순간이 있었긴 했지만, 그게 꽤 상처였다. 저가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럴 자격이 안 되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저를 괴롭히고 있는 지금 이 이상한 감정들이 몹시 혼란스럽고, 의문이었다. 


스케줄이 끝나고 다시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는데, 선우가 이번에도 역시 감독님과 붙어서 그와 함께 가려 했다. 태준은 저도 모르게 “왜요?” 하고 조금 까칠한 말투가 나가버렸다. 


“뭐가? 나 감독님이랑 이야기할 게 좀 남아서, 먼저 들어가서 자.”


선우는 웃는 얼굴을 하고 태준을 돌아봤다. 태준은 무표정하게 선우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침 선우의 옆에 있던 감독님이 선우에게 손사래를 치며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하니까 다음에 얘기해.” 하고 선우를 거절했다. 


“아니 어제 뭐 별 얘기도 안 했잖아, 용건 있다고 와놓고?”


하품하며 먼저 갈게, 하고 가버리는 바람에 태준과 선우 만이 남았다. 태준은 누군가 제 심장을 잔뜩 구겨 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말이지 명백했다. 선우는 어제부터 태준을 피한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나랑 자는 게 싫었나 봐요? 내가 첫날에 코를 골았나?”


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농을 던졌다. 하지만 이미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아버린 기분은 나아질 수 없었다. 선우에게 방금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는지, 잘 몰랐다. 그래도 이래야 했다. 자신이 선우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되질 못 하니까. 선우는 태준이 지금 화를 낸다면 우스울 수도 있었다. 니가 왜? 하고.


“먼저 갈게요.”


태준은 선우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먼저 방으로 걸어갔다. 선우가 저를 쫓아 오든, 아님 정말 감독에게 할 말이 있어 가든, 더 이상 참견할 수 없는 일이었고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선우는 태준이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방으로 돌아왔다.


“...나 먼저 씻어도 돼?”


선우는 꽤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하고만 태준은 선우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방 안에 비치된 냉장고를 뒤적여 맥주를 땄다. 한 번도 입을 떼지 않고 곧장 속으로 술술 넘겼다.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한 캔을 더 따서 마셨다. 마시다 남은 와인도 있어서 병째로 들이켰다. 태준이 술에 쉽게 취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연거푸 그렇게 들이키니 확 하고 순식간에 몸에서 열이 올랐다. 어쩌면, 계속해서 속에서 끌어 오르고 있던 감정의 열일지도 몰랐다. 태준은 어질한 머리를 짚으며 제 상의를 벗어 던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확인이 필요했다. 도저히 자신이 지금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어야 했는데, 없는 게 맞는데. 찰랑거리던 물잔에는 이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떨어져 파장을 만들어 냈고 깊이 일렁이고 있었다. 


욕실의 물줄기 소리가 끊어졌을 때, 와인병을 내려놓고 욕실 문 앞에 가 섰다. 선우는 오래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가, 드디어 문이 열렸다. 아니 문이 열렸는가 싶더니 태준을 보자마자 곧장 문이 쾅 하고 다시 닫혀버렸다. 선우는 숨어버렸고 태준은 침묵하고 있었다.


“....너 뭐, 뭐야.”


잠시 후 문 너머에서 당황한 듯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은 술기운을 빌어 지금, 선우에게 따지기로 했다. 도대체 어쩌고 싶은지, 왜 손을 잡고 자꾸 여지를 준 것인지, 우리는 정리를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그냥 이렇게 구질구질한 감정들을 끌고 가고 싶은 것인지. 확실히 하고 싶었다.


“무슨 생각 드는 거예요? 그냥 동료 후배가 씻으려고 차례 기다리고 있던 거라고 생각 안 해요?”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태준은 가슴께에 콱하고 막혀 있던 감정의 덩어리를 울컥 내뱉었다. 


“나한테 계속 왜 그래요? 정리하겠다는 건지 아님, 아님… 대체 형은 어쩌고 싶은 거예요? 괜찮아졌다 싶다가도 자꾸 형이 날 휘두르니까,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눈물이 고였다. 제가 말하면서도 깨달았다. 태준은 단 한순간도, 아주 조금도, 선우를 전혀 정리할 수 없었다. 그냥 연기력이 늘어 있었을 뿐이었다. 괜찮은 척, 정리하고 있는 척 스스로에게 마저 연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았고 전혀 잊을 수 없었으면서.


선우는 태준에게 모든 처음이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었고, 잘하는 걸 보여주고픈 사람이었고, 기쁨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고,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었고,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었고, 안기고 싶은 사람이었고,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중요해요? 형은 그때도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잖아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헤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별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태준은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더 나은 길이라고, 그게 맞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선우가, 아프거나 괴롭지 않길 바라면서.


하지만, 할 수 있었다면 잡고 싶었다. 늦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이라도 다시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붙잡아도 되는지 아닌지. 태준은 참고 참았던, 어떤 설움과 커다란 슬픔이 짓누르는 것을 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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