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은 주어진 일은 늘 열심히 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12월에는 유독 더 열심히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조금의 NG도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처럼 굴며, 대부분 한 방에 오케이를 따내 제 촬영분을 확확 줄여나갔다. 간혹 상대방이 NG를 내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가 자신보다 선배 배우라 할지라도 까칠한 한 마디를 툭툭 던지며 심경의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촬영 일정은 다행히 예정했던 것보다 빠르게 종료될 수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복귀한 태준은 당장, 미리 싸뒀던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달렸다. 한 차례 앞 타임의 비행기를 무사히 탔다는 선우의 문자를 확인하며 태준은 제 티켓을 확인했다. 목적지는 그리스, 그들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작년에 선우가 갑자기 덜컥 마련했던 그리스의 별장은, 두 사람이 온전히 함께하기 위한 공간으로 준비했던 것이지만 정작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아 제대로 가질 못하고 있었다. 가끔 휴일이 맞아떨어지는 때가 있다 해도 하루 이틀 정도니 그리스까지의 여정을 생각하긴 어려운 점이 있던 것이다. 물론 금이가 떠난 뒤로 태준이 거의 선우네 집에서 동거하다시피 함께하고 있어 ‘두 사람의 공간’이 따로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별장에서 함께 휴가를 보내는 건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 공통의 의견으로 두 사람은 오는 크리스마스에 맞춰 7일간 함께 별장을 가기로 굳게 약속해두었던 것이다.
그리스에 도착하니 날이 참 좋았다. 겨울의 그리스는 비가 자주 내리는 편이라지만 선우와 태준이 도착한 그 날은 온화했다. 추위를 싫어하는 선우에게 딱 좋을 기후였다. 날씨만으로도 선우가 보고 싶어 진 태준은 좀 더 서둘러 별장으로 향했고, 먼저 별장에 도착해 있던 선우와 만나자마자 입부터 맞추었다. 선우가 맞물린 입술 틈새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야.”
태준은 선우를 꽉 끌어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마주 안고 등을 토닥여주던 선우가 이제 그만하고 짐 좀 정리하자고 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태준은 선우가 마저 짐을 좀 정리하겠다며 2층으로 가고 나서야, 별장 안이 눈에 들어왔다. 쭉 둘러보니 복층에 지하까지 총 3층으로 된 별장은 전체적으로 나무의 결을 살려낸 벽과 바닥, 인테리어들로 인해 굉장히 아늑한 오두막 같은 분위기였다. 관리를 맡겨둔 Mr.Bob이 청소도 꾸준히 해뒀던 모양인지 집주인들이 전혀 살고 있지 않은 곳임에도 먼지 없이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거실 한편에 트리로 만들 나무도 준비되어 있었다. 형, 우리 관리인 잘 둔 것 같네요- 태준이 감탄하자 2층에서 선우도 동의했다. 그치? 보너스 좀 드려야겠어.
“2층이 침실이야. 너도 올라와서 짐 좀 정리해.”
“별장 진짜 좋아요.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태준이 계속 올라올 생각을 않자 선우가 계단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태준은 그제야 제 캐리어를 들고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또 한 번 감탄했다. 뷰가 굉장히 좋았다. 이렇게 좋은 곳을 계속 못 왔다는 뒤늦은 아쉬움과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간 지낼 기대감에 태준은 선우를 끌어안으며 속닥거렸다. 너무 좋아요, 좋아해요.
태준의 짐 정리까지 마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Mr.Bob이 준비해준 트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전구와 장식을 달며 장난도 치고 서로에게 주려고 가져온 선물을 새벽에 넣어두기로 약속하며 양말도 걸었다. 한참 그러고 있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역시 준비되어 있던 음식 재료들 몇 가지로 저녁도 차려 먹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렇게 그리던 두 사람의 시간이다. 태준도, 선우도, 날을 그냥 넘길 마음은 없었다. 일 때문에 최근 마주하지 못했던 서로의 몸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탐했다. 고요한 별장을 뜨거운 두 사람의 숨이 채워갔다. 언제 새벽을 넘어갔는지도 몰랐다. 정신없이, 온전히 두 사람만이 집중하는 시간이었고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끌어안으며 잠이 들었다.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서로의 선물을 넣어두기로 했던 트리의 양말은 그냥 빈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부스스 눈을 뜨고도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한참 후에야 아차, 하고 약속했던 걸 깨달았지만 둘 다 잊어버렸던 약속이니 그냥 웃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준비한 선물은 서로 증정식을 하기로 하고 선우는 제 짐이 담겨 있던 캐리어 외의 다른, 열어 두지도 않았던 캐리어 하나를 끌어왔다.
“일단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는…”
캐리어에서 하나둘 꺼내지는 시계니 옷이니 신발 등등 여러 가지가, 전부 태준의 것이었다. 선우는 이걸 왜 태준에게 주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하나하나 설명을 해나갔다. 이건 너 블랙 의상 입을 때 잘 어울릴 거고, 이건 너한테 꼭 주고 싶었고- 선우는, 이 별장 건도 그랬었는데, 약간 금전 감각이 태준과 다른 면이 있었다. 소위 씀씀이가 무지 헤펐다. 다행이라면 다행히 태준 한정이긴 했으나, 태준이 사달라고 하면 다 사줄 기세였다. 물론 태준이 선우에게 뭔갈 사달라고 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캐리어 하나가 통째로 태준의 선물이 들어 있던 결말을 맞이하고 태준은 조금 난감해했다.
“이걸 다 어떻게 들고 가라는 거에요?”
“내가 들고 왔잖아.”
캐리어를 손짓해 보이는 선우는 그게 뭐 대수냐는 얼굴이었고, 태준은 우선 선물은 고맙다며 선우의 볼에 키스했다. 다시 선우의 캐리어 속으로 태준의 선물을 정리하는 동안 태준은 제가 준비한 선물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선우가 준비한 부피에 비하면 다소 작고 수량은 박스 하나였다. 그래도 선물답게 리본으로 포장도 거창하게 한 상자였다.
“뭐야 이게..?”
“크리스마스니까, 거기 걸맞은 트리 테마에요.”
선우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작은 천 조각에 주렁주렁 전구가 딸려 나오는 그것은, 이벤트용 속옷이었다. 그러니까 태준이 말한 대로, 트리를 주제로 한. 테마 세트답게 속옷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트리를 상징화한 녹색의 전구 달린 속옷에 이어 노란 별이 큼직하게 달린 속옷과 그의 세트인 별 머리띠도 들어 있었다. 선우는 말이 없었다. 물론 태준이 이 이벤트용 속옷을 입자고 준비하긴 했으나 선우가 순순히 입어주지 않을 것을 대비해 별이라도 머리에 써달라고, 사실은 그게 주목적이 될 선물을 준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거 진짜 불 들어오는 거야? 입으면 안 뜨거워?”
“뜨거우니까 빨리 벗으라는 거 아닐까요?”
“늦게 벗으면 다 타겠네.”
“어, 어… 네… 그러..게요....”
태준은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선우가, 너무 순순히 전구가 달린 속옷을 입어주고 있던 탓이었다. 어, 어 하는 사이 태준에게 별 세트가 내밀어졌다. 너도 입어, 머리도 하고. 선우가 웃어 보였다. 생각하던 풍경은 아니었지만 태준은 기꺼이 별이 되었다.
“형, 켤게요?”
선우가 작게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은 스위치를 켰다. 전구들에 불이 들어와 눈앞을 현란하게 만들었다. 선우는 우습긴 우스웠던지 푸 웃음을 터뜨렸고 태준은 혹여 선우가 뜨거울까 봐 서둘러 속옷을 벗겨냈다. 짧은 시간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 이벤트용 트리는 빠르게 해체되어 어느덧 침대 밖 바닥으로 떨궈졌다. 태준은 선우의 얼굴을 붙잡고 양 볼에 쪽쪽 뽀뽀했다. 마지막엔 입술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선우가 태준을 끌어안으며 응답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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