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Special Special day
Scene

"형, 저 해선이 연기 해주시면 안 돼요?"

 

뜬금없는 부탁에 선우의 목소리에 황당함이 실렸다. 지금? 갑자기? 선우 입장에선 갑작스런 얘기니 당황스러울 법 했다. 다만 태준은 선우와 통화를 하기 좀 전까지 '죄와 나'를 복습하던 터라, 생각이 그리 튀는 게 그리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 앞에 일시정지 상태인 '죄와 나'의 해선이 화면 한 가득이었다.

선우와 그리스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다시 시작하자 했을 때, 두 사람은 비유하자면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됐다.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 없었고, 실제 만나는 자리에선 그냥 단순한 동료인 척 연기해야 했다. 두 사람의 연애수단은 늘 기껏해야 영상통화가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시간과 장소가 둘 다 딱 떨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어 문자로만 보고싶다 보고싶다 외쳐댔다. 

아무리 외쳐도 해소되는 건 없으니 태준이 선우를 너무도 보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선우의 작품을 보는 일이었다. 근데 그게, '죄와 나'를 워낙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태준이기에 자주 수단이 되곤 했다. 정말 오래였다. 선우를 사랑하기 전부터니까.

 

'죄와나'를 제일 처음 봤던 때의 감상은 ‘대단하다’였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참 암울한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무겁게 깔린 메세지는 관객의 마음 또한 묵직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머리까지 묵직하게 만들진 않았다. 영화를 끌어가는 '소년'의 감정과 동화되어 빠져들게 했다. 그 연기력에 감탄했고 머릿속이 다 비워진 채 오직 그 '소년', 해선만이 가득 채워지게 했다. 

몇 번을 돌려보았다. 분명 처음 '죄와 나'를 플레이 하게 된 건, 제게 연기를 가르쳐주는 이의 실제 연기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좀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이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모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까만 화면만이 채워진 TV를 멍하니 보던 태준은 제가 공부는 커녕 내용만 정신없이 빠져 있었음을 깨닫고 다시 플레이 해야 했다. 다만 두 번째, 세 번째 시도 역시도 계속 제 정신을 앗아가는 통에 결국 포기하고 통으로 영화를 외울 것처럼 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 몇 번을 봐도 여운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해선은 사랑스러웠고 처연했으며 마음을 쓰이게 했다. 그 눈빛, 그 손짓, 그 표정들 모든 것이 그러했다. 한 동안 태준은 해선에게 온통 빠져 있었다. 뒤늦게 영화를 접한 터라 기념품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쉬워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포스터라도 구해냈다. 벽에 붙은 해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도 뿌듯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얼굴이, 연습실에서 마주하면 너무도 다른 이였기에 신기했고 대단해보였다. 제 앞에서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연기를 지도 하는 선우의 얼굴은 해선과 똑같지만 전혀 해선과 달랐다. 저런 사람이다, 저런 사람인데, 그런 연기를 했다. 자꾸만 선우를 들여다보게 됐다. 선우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다. 인식하면서 관찰하려 한 게 아닌데, 그냥 계속 시선을 빼앗겼다. 아 저런 눈빛을 하기도 하는 구나. 저런 표정을 짓기도 하는 구나. 실제 말투는 이렇구나. 저의 머릿속에 각인 된 해선을 선우는 하나 둘 깨부쉈다. 해선과 다른 선우의 여러 부분들이 대신 채워져갔다. 더 알고 싶어져서 다른 작품을 섭렵했어도 마찬가지였다. 연기하는 선우와 제 앞의 선우. 그 여러가지 모습들을 늘어놓으면 그저 대단하단 생각만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태준은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배우게 된 계기는 제가 앞으로 이걸로 먹고살자고 선택했기 때문이었지, 정말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까지 도달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정말 애를 쓰고 노력했다. 물론 그리 쉽게 괜찮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아지는 모습을 보며 선우가 저번보다 낫다는 간단한 말을 던지는 것에 뿌듯한 기쁨을 느꼈다. 

그렇게 쌓였던 것들이, 돌이켜보면 사랑이었다. 사랑받는 법도 모르는 아이가, 그런 데에 익숙하지도 않아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소년이, 처음으로 자신을 제대로 봐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생긴거었다. 제가 가지는 관심처럼 그 역시도 제게 관심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남들이 모두 아는 선우의 모습도, 그러고도 태준에게만 보여주는 선우의 모습은 더더욱 좋아서. 시작한 뒤에는 멈출 줄 몰랐다. 매일 매일이 커져가기만 했다. 

그 마음은 한 번의 이별을 겪고 나서 다시 시작하게 된 지금까지도 계속이었다. 저 높은 곳에서 이미 반짝거리며 빛나는 그가 때론 아름다웠고, 어느 때는 온전히 제 눈에만 빛났으면 좋겠단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 충돌되는 생각 속에서 끙끙거렸다. 그렇지만 선우는 어디서도 빛났고, 제 곁에서도 빛나주겠다며 태준의 옆에 와 서 주었다. 그것이 태준의 행복이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너 내가 아니라 해선이 좋아하는 거지.">

 

선우가 다소 불퉁한 목소릴 냈다. 얼마 전에도 태준이 선우에게 '죄와 나'를 다시 보았다 얘기하며 해선에 대한 이야길 꺼냈었다. 그때는 선우가 해선을 연기하던 때에 대한 물음들이 이어졌었다. 어떤 감정으로 연기했는지 감정이 고조 되서 너무 몰입될 땐 어땠는지 같은 것들이라, 연기에 대한 자세를 참고하고자 하는 구나 했었는데. 이렇게도 계속 해선이 화제에 오르니 선우로선 다소 복잡한 심경이었던 터다. 태준은 슬쩍 웃음이 터졌다.

 

"해선인 해선이고, 전 형 무지 사랑하죠."

 

아아 영상통화였으면 좋았을텐데. 선우의 스케줄 상 영상은 무리였는지 음성만으로 통화하는 상황이었는데, 태준은 방금의 대답을 듣고 난 선우가 어떤 표정을 하며 침묵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보고싶다아.

 

"그러니까, 해선이가 좋은 게 아니라 해선이도 연기한 하선우를 사랑하는 거라구요."

<"하 참.">

 

답이 없는 선우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구구절절 선우에게 늘어놓은 태준의 설득 끝에 결국 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 안 해주면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냥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었다. 어느 정도, 태준은 선우에게 팬심도 깊었기 때문에. 당신의 일을 사랑해요.

 

<"...형.">

 

태준은 순간 고개를 들어 TV화면을 보았다. 화면은 여전히 일시정지 상태였다. 방금 들린 소리는 역시, 전화 너머에서 들려 온 소리였다. 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머에서는 조금 망설이는 듯 침묵이 길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이거 해주고 나면 형도 내 부탁 들어 주는건가요?">

 

선우의 목소리지만 선우가 아니었다. 해선이지만 해선도 아니었다. ‘죄와 나’에서 나온 적 없는 대사였지만 해선의 말투와 어조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선우는 여전히, 아니면 더욱 선명하게 해선을 재연해내고 있었다. 태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에 찬 신음을 흘렸다. 선우가 진짜로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그의 연기력과 집중력이 너무 대단했다. 귀 끝에 소름이 일 정도로 좋았다. 가만히 있으면 선우가 금방 그만둬버릴까봐 태준이 얼른 전화기를 더 바싹 귀에 갖다붙이며 답했다.

 

"다음에 내가 뭐든 다 따를게요. 지금은, 해선이 인거..지?"

<"응. 그래요.">

"해선아."

<"왜요, 형?">

"널 굉장히 만나고 싶었어."

 

시간을 돌려도 만날 수 없을, 그때의 선우가 담겨진 아이. 태준이 모르던 때의 선우가 고민하고 노력한 끝에 보여주었던 그때의 모든 결실. 해선의 형, 하고 부르는 소리만으로 태준은 오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저기, 계속.. 형이라고 불러주면 안 돼?"

 

태준은 힐끔 화면의 해선을 보았다. 음소거를 누르고 화면을 플레이했다. 애띤 얼굴의 선우가 벙긋벙긋 입술을 움직였다.

 

<"그 동안 형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어요?">

"그건.. 아닌데..."

 

뜨끔 지레 찔려버린 태준이 말을 얼버무렸다. 진짜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근데, 선우에게서 듣는 형이란 소리가 진짜 좀, 평소와 다른 느낌이라서. 찾으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선우를 태준은 정말 많이도 찾고 또 찾아왔다. 그래도 항상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제가 알지 못 하던 그 많은 시간들이 그토록 욕심이 났다. 그 중의 큰 하나 선우가 과거 가장 힘들던 시기가 담긴 해선이다. 근데 전화기 너머의 선우가 저를 위한, 저만을 위한 해선이가 되어준다. 채워지지 않을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던 부분들이 다시 선우로 채워진다. 

선우가, 아니 해선이 전화 너머에서 계속 태준을 불렀다. 형,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해요? 계속 해야 해요? 응? 태준이형.

 

"형. 저 지금 진짜 계 탄 기분이에요."

<"그게 뭐야.">

"되게 행복해요."

<"해선이 해준 게?">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물론 아닌 건 아닌데, 그거 말구요. 그냥..." 

 

제 기분을 잘 전달하기 어려웠다. 역시 영상으로 통화했어야 했는데. 그럼 제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선우도 잘 읽을 수 있었을 거다. 말로만이 아닌 눈빛과 입술의 떨림 얼굴 근육들의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직업을 갖고들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이 감정엔 그 어떤 연기도 들어 있지 않고, 전부 진심이다. 태준은 지금 제가 선우에게 곧바로 전할 수 없는 이 감정을 그나마 말로써 전달해내기에 최적의 문장을 생각해냈다.

 

"형. 진짜 진짜 많이 보고 싶어요."

<"응. 나도.">

 

선우에게서 꽤나 곧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같은 마음이었던 모양이었다. 두근거렸다. 여전히, 매일같이, 언제까지고 선우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같았다.

 

"사랑해요."

 

그 말에는 나도, 라는 대답이 아니었다. 똑같은 발음의 단어가 선우의 목소리로 전해졌다. 사랑해, 남태준. 태준은 그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아, 이렇게도 행복하다.

 

 

 

 

-26살 어느 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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