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Scene

BGM : https://www.youtube.com/watch?v=mUSmcaESHAE (10초부터 재생!)




  “영화 많이 기대하고 왔습니다. 다들 고생하신만큼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영화 ‘재’ 파이팅!”



  멘트를 마치고 선우는 들고 있던 마이크를 스탭에게 넘겼다. 그가 포토월을 떠나자 아쉬움 섞인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선우는 언제나 그렇듯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포토월 뒤쪽엔 관객석으로 안내해주는 스탭이 대기하고 있었다. 몇 가지 유의사항과 설명을 듣고서야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겨우 혼자가 된 시간이었다. 선우는 그제야 얼굴의 미소를 거둘 수 있었다. 영화 ‘재’의 VIP 시사회. 선우와 깊은 인연을 가진 감독의 3년만의 복귀작이자, 헤어진 연인의 첫 스크린 주연작이었다. 장장 5개월 만에 다시 보게 될 얼굴이었다. 담배라도 한 대 태우고 올 걸. 선우는 그리 생각하며 어두운 상영관에 발을 들였다. 혀끝에 쓴맛이 맴돌았다.



  언젠가 장준혁 감독에게 연락이 왔었다.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시나리오를 읽어 달라, 좋은 배우가 있으면 추천해달라는 게 목적이었다. 보통 다른 감독에게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연락이 오면 선우 자신의 캐스팅을 염두에 뒀겠지만, 선우에게 있어 장준혁 감독은 그 의미가 조금은 남달랐다. 그의 첫 영화에 주연을 맡았고 그 이후에도 종종 우정출연으로 작품에 참여했다. 장준혁은 재능 있는 연출가였다. 그 재능의 가장 아래엔 솔직함과 단순함, 그리고 단호함이 깔려있었다.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원하는 바를 숨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선우를 캐스팅하길 원했다면 바로 회사를 통해 연락을 줬을 거다. 그의 그런 성격을 알기에 별 오해 없이 시나리오를 읽어줬고 가장 그럴듯한 배우를 추천해줬다.



  [“걔는 우리랑 달라요. 보고 있으면 반짝반짝하잖아요.”]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상상했던 진영이 그대로 스크린에 떠올랐다. 좋아하는 아이를 이야기하며 눈을 빛내는 소년은 그 누구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찬란하게 빛이 난다. 그 빛은 숨길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인다. 진영은, 태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의 태준은 선우에게 있어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었다.



◁◀ 



  선우는 제 볼을 배회하는 손을 잡아다 곧장 자신의 입안으로 넣었다. 태준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입안의 손가락을 가볍게 질겅였다. 영화에 집중하려는 순간마다 태준은 꼭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해왔다. 선우 얼굴에 있는 점을 건드리는 건 태준의 습관이었다. 제 얼굴을 매만지는 손가락을 잡아다 무는 건 선우의 습관이었다. 그렇기에 선우는 태준과 함께 본 영화 대부분의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선우의 집에서 영화를 볼 때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서로 자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입안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가볍게 빨아들였다. 짧게 젖은 소리와 함께 입안의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시선을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태준의 얼굴이 점차 내려오더니 이내 선우의 코끝과 부딪혔다. 결국 이번 영화도 결말을 보지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했다. 그렇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선우는 팔을 뻗어 태준의 목을 감싸 안았다. 커다란 몸이 따뜻하게 엉켜들었다.



  “형, 간지러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준은 선우의 손을 내치지 않았다. 태준의 왼쪽 쇄골엔 작은 별자리가 수놓아져있었다. 한바탕 정사를 끝마쳤다는 표를 내는 듯 쇄골 주위가 빨갛게 올라와있었다. 선우는 손끝을 내밀어 태준의 별자리를 가만히 두드렸다. 어떤 성적 의도도 담지 않은 담백한 손길이었다. 선우는 다양한 의미로 태준의 나신을 좋아했다. 그건 아름다운 조각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입장이기도 하였고 무대에 세운 배우를 바라보는 연출가의 눈이기도 하였으며 사랑스러운 연인의 몸을 안는 남자의 마음이기도 하였다.



  “도레미파솔.”

  “네?”



  미, 레, 도, 레, 미, 미, 미-



  계이름 하나하나에 음을 맞춰가며 선우는 태준의 점을 두드렸다. 창의력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름 짓기였다. 그래도 태준은 제 점에 지어진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작게 웃어주었다. 선우는 짧은 곡을 다 연주하고 나서야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한 번 짧게 입 맞추었다. 태준의 얼굴이 점 위에 새겨진 자국만큼 붉게 물들었다. 그게 퍽 예뻐 보여 선우는 태준의 얼굴에도 가볍게 입술을 대고 웃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지만 따뜻했다. 허리로 태준의 팔이 단단하게 파고들었다. 피곤하다 밀어내봤자 그대로 물러날 이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태준이 하는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선우는 태준에게 제 마음을 내어주었다고 생각했다. 뭐든 가지고 싶은 사람이 가지는 게 좋지.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지는 태준의 머리칼의 감촉이 좋았다. 결국 선우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에 가진 사람이었다.





  언제 봐도 깔끔하기 그지없는 사무실이었다. 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위치에 선 회사의 사장이었으면서도 그는 항상 초심을 잃는 게 가장 나쁘다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선우는 그가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저는 초심을 잃어도 아주 많이 잃은 사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눈이 마주친 건 윤 실장이었다. 그때부터 오늘 할 이야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며칠 전 회사 회의실에서 태준과 입을 맞췄던 게 문제였다. 문에 등을 지고 있었던 태준은 몰랐겠지만, 선우는 중간에 열린 문을 눈치 챘었다. 이후 윤 실장은 대놓고 선우와 태준을 어색해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에게 발각된 게 다행인 일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윤 실장은 내부의 사람이었고, 배우 하선우의 편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건 자신이었다. 내가 조심성이 없었던 거지. 아주 어릴 적부터 만나와 이제는 스스럼없는 사장은 굳이 태준까지 이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그건 하선우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의 지혜였다. 일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걸 사장도 윤 실장도 선우도 알고 있었다. 의미 없는 안부만 몇 마디 주고 받고서야 본론이 나왔다.



  “왜 부른지 너도 알지?”

  “네.”

  “괜히 이상한 찌라시 돌면 안 좋은 거 알잖아. 너도 태준이도 중요한 시기인데.”



  선우의 답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끝났다. 간결하지만 확실한 답이었다. 이후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하고서 선우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애초에 답이 정해져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하선우는 이만하면 깔끔하게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시작했던 장난 같은 연애였고 언제가 끝을 생각하며 달려왔던 시간이었다. 태준의 연인으로 지낸 시간에 비할 수 없이 배우 하선우로 지낸 시간은 길었고 단단했다. 재미로 벌인 일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선우는 휴대폰을 들어 바로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태준의 얼굴 위로 수많은 감정이 물들여졌다. 그래도 나름 오랫동안 마주한 얼굴이건만 연애 이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선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헤어지자고. 생각보다 더 건조한 목소리가 나갔다. 태준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쉽게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태준의 반응을 지켜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선우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댔다. 눈앞의 태준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거 같은 눈을 하는 게 안쓰러워 손이라도 뻗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지만, 이 문제만큼은 너그러워질 수 없었다.



  “몰래 하면 되죠. 안 들키면 되잖아요.”

  “퍽이나 안 들킬 수 있을 거 같지?”



  태준은 저도 잘 알면서 애써 외면하는 게 분명했다. 선우는 아주 어릴 적부터 연예계에 발 담그고 살았다. 그는 얼마나 많은 스타들이 얼마나 다양한 이유로 빛을 잃고 떨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동성연애라는 건 치명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성지향성을 숨긴 채 연예계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누군가에게 들킨 이상 큰 약점은 될 수 있었다. 한창 주가를 올리는 선우에게도 이제 막 라이징스타가 되려는 태준에게도. 목을 드러내면 결국은 물려 죽고 만다. 한낱 불장난으로인해 나락으로 떨어지기엔 두 사람 모두 아쉬운 처지였다.



  “정신 차려, 남태준. 이제 막 성인 된 애새끼도 아니잖아.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질,”



  갑작스레 벽으로 밀쳐진 선우는 작게 신음했다. 뭐라 화를 내기도 전에 태준의 입술이 선우의 목소리를 삼켰다. 비릿한 쇠 맛이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들었던 선우는 이내 팔에 힘을 풀었다. 태준은 곧 죽을 사람처럼 선우에게 매달렸다. 평소보다 훨씬 거칠고 조급한 입맞춤에도 선우는 어떤 반응도 없이 가만히 서서 태준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불꽃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태준의 입술이 겨우 떨어져나갔다. 선우는 절 잡고 있는 태준의 손이 떨리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선우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 됐지?”



  여전히 입안에 피 맛이 돌았다. 선우는 손등을 들어 제 입술을 닦아냈다. 태준의 얼굴에 수많은 금이 쳐졌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얼굴은 이내 한 감정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정도 상처를 주었으면 되었다. 선우는 제 앞을 막고 있는 태준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태준을 밀어낼 수 있었다. 이만 간다.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 선우의 구두 소리만 울려퍼졌다. 



  그 후 태준이 선우를 다시 찾아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태준은 결국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건 선우가 예상했던 바였다.



  “마지막으로 밥이나 먹으러 가자.”



  허나 선우는 제가 왜 마지막 말을 덧붙였는지 알 수 없었다.





▷▶

  

  [“지금 사과하면 늦은 거겠지? …그래도 미안해, 아직도.”]





   제멋대로 과거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잡아다 겨우 시선 앞 화면으로 고정시켰다. 영화는 어느새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선우의 예상대로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주위에 훌쩍이는 소리가 하나둘 더해졌다. 주인공이 스스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음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던, 그리고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직접 떠나보내야하는 인물. 황폐한 공터 한가운데 주인공 진영의 주위를 떠도는 건 재 뿐이었다. 우리는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메시지를 오컬트적인 요소를 더해 신선하게 풀어냈다. 영화는 잘될 것이다. 장준혁 감독은 이로써 더욱 믿고 보는 감독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태준은 더욱 촉망 받는 배우가 될 것이다.



  [“안녕.”]



  모든 게 해피엔딩이건만 선우는 왜인지 목 끝까지 답답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태준과의 마지막 식사는 놀랍도록 평범했다. 평소 가던 식당에서 평소 자주 즐기던 음식을 주문하고 평소처럼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도 그럴게 선우는 크게 달라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좋아서 만났고 합의하에 연애를 하였고 문제가 생겨 헤어질 뿐이었다.



  “알아서 먹을 테니까 치워요.”



  태준이 저리 날카롭게 나오는 이유를 선우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이해하기로 하였다. 태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인 직후니까. 선우가 살아온 시간과 태준이 살아온 시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태준도 온전히 선우의 입장을 이해하고 가장 좋은 답이란 걸 깨달을 터였다. 선우는 태준의 앞 접시 위에 고기를 한 점 떠 올려주었다. 태준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태준의 붉어진 눈가를 선우는 애써 모른 척하였다.





  식당 밖은 겨울임을 알려주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선우는 흘깃 옆에 서있는 태준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제 차를 타고 왔으니 돌아갈 수단이 마땅치 않을게 분명했다.



  “데려다줄까?”



  태준은 별 대답 없이 먼저 선우의 차에 올라탔다. 신경 끄라고 팽을 놓을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른 행동에 선우는 조금 당황하였다. 그러나 예의상 뱉은 말은 아니기에 불만 없이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선우는  굳어버렸다. 시트에 앉아있는 태준이 홀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선우는 몇 번 입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문을 닫고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운전하는 내내 태준의 울음소리는 작아지고 커지기를 반복하였다. 선우와 태준은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익숙한 곳에 도착하고서 선우는 시동을 껐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태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태준은 제 집에 닿은 걸 깨닫고서야 울음을 그쳤다. 온전히 눈물을 멈췄다기보다 삼켰다는 게 알맞은 표현이었다.



  “…….”

  “…….”

  “…잘 자.”



  선우의 인사에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전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태준은 이번에도 특별한 대답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차문이 열리고 태준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까지의 미련은 더 이상 없었다는 것처럼 태준은 단 한 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태준의 뒷모습이 작아지고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한참을 선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제 오른손이 시야에 잡혔다. 손가락 사이로 감겨들었던 감촉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태준은 보지 못하였지만, 실은 선우는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 태준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 그건 제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거두어서 다행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범할 뻔하였다. 선우는 가볍게 손을 쥔 후 이내 다시 폈다.



  우습게도 그제야 태준과 헤어졌음을 깨달았다.



  사귀기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더는 그러지 못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태준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걸 선우는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작은 헛웃음이 입술 새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멍청한 건 남태준이 아닌 하선우였다. 손끝에 느껴지는 심장박동이 싫어 선우는 핸들에 올라간 제 손을 이마로 지그시 눌렀다.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하선우는 여전히 연기를 사랑했고 욕심이 많았으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제 연인을 내쳤다. 



  창밖으로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 겨울이었다.





▷▶





  “안녕하세요. 진영 역을 맡은 남태준입니다.”



  기억하던 마지막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옛 연인은 활짝 피어난 얼굴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수많은 플래시 샤워를 받으며 능숙하게 질문에 답변을 하는 모습은 누구보다 그 자리에 걸 맞는 사람처럼 보였다.



  ‘좋아해요, 형.’



  구질구질한 것도 정도가 있지. 선우는 과거의 환영을 지워내기위해 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더 이상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며 고백을 하는 아이는 없었다. 원하는 대로 태준은 화려하게 꽃을 피워가는 중이었다. 이제와 그 꽃이 탐난다 꺾을 수는 없었다. 탐을 낸다 생각하는 것조차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무대인사까지 끝나고서야 선우는 영화관을 떠날 수 있었다. 감독의 얼굴을 보고 몇 마디 칭찬이라도 건네는 게 예의란 걸 알았지만, 그 옆에 붙어있을 사람이 누군지 뻔해 차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대신 휴대폰을 켜 문자함을 열었다. 대면으로는 말을 못했으니 어설픈 문자라도 보낼 셈이었다. 그러나 결국 휴대폰도 차 시트 어느 구석으로 던져야했다. 이미 삭제했으나 또렷하게 머릿속에 새겨진 번호 하나가 손끝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영화 잘 봤어. 연기 많이 늘었더라. 걱정하더니 잘 할 줄 알았어. 너랑 어울렸으니까.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내내 선우는 전하지 못할 말을 되뇌었다. 짙은 연기가 코끝을 감쌌다. 복잡한 머릿속을 안개가 감싸는 기분이었다.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 몇 번이고 다시 되돌려본 그날의 영상들, 새롭게 적어본 과거의 상황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결국엔 태워버리기로 하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선우는 결국 남태준을 남은 재처럼 털어낼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만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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